윤석열에 대해 알아보자
목차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기 전 까지 어떤 일들을 했는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싶으시다면 아래 본문을 참고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윤석열
프로필
- 출생 : 1960년 서울특별시
- 나이 만 61세 - 신장 : 175cm
- 소속 : 대한민국(대통령)
-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서울대학교 법학과 학사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윤석열은 추위가 한창이던 1960년 12월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태어났다.
윤석열의 아버지 윤기준 교수는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공동설립자로 어릴 때부터 아는 것이 많고 머리가 좋아 초등학교 시절 돌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광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9년 충암중학교와 충암고등학교를 졸업한 윤석열은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다.
윤석열은 서울대 모의재판이 열렸을 때 신혁확(당시 국무총리)을 사형시키고 전두환(국군 보안사령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사 역할을 맡았다. 5·18 민주화운동을 열흘 앞두고 있던 날이었다.
윤석열이 판사를 맡았던 모의재판 이야기는 순식간에 학교 안팎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보안사령부의에 있던 한 친척은 윤석열을 불러 3개월 동안 강원도 강릉으로 대피시켰다. 대피를 마치고 돌아온 윤석열은 사법시험 2차에서 여러 차례 낙방했다. 이때 실패한 이유가 판사 역할을 한 모의재판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윤석열 본인은 넓고 깊이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는 시험을 준비하던 중 의리 때문에 여러 번 낙방했었다. 계속된 실패로 정신적으로 힘들겠지만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법학석사를 받고 1991년 32세의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밖에도 윤석열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중에도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후배들과 서울대 도서관이나 인근 독서실에서 토론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법시험 경험이 많다보니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윤석열은 신림9동에서 신선으로 불렸었다.
어렵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윤석열은 1994년 대구지검 검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윤석열은 이후 1996년 강원도 춘천지검, 1997년 수원지검 성남지청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 때인 1999년, 그는 서울 중앙지검에 들어갔다.
지금부터 윤석열의 화려한 업적이 시작되는 대목이다.
1999년, 김대중 정부는 경찰 실세로 여겨졌던 박희원(치안감)을 뇌물수수 혐의로 소환하여 조사하였다.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들이민 것이다. 소환된 박희원은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하루 만에 모든 것을 털어놨다.
윤석열이 터무니없는 양의 증거를 수집하고 심문했기 때문에 박희원은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하고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후 2002년, 윤석열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검찰을 나갔다. 그러나 직무에 적합하지 않아 1년 만에 복직한 윤석열은 곧바로 참여정부의 측근인 안희정, 강금원을 체포하였다.
2006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검찰연구관으로 근무하며 현대차 비자금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게 되는데 그는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정상명에게 면담을 신청한 뒤 정몽구 회장을 구속해야겠다라며 나를 자르거나 정몽구 회장을 구속해야 한다는 뜻에서 정몽구 회장을 구속해야 한다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정상명 전 검찰총장이 고심 끝에 정몽구 회장을 구속했는데 정말이지 겁이 없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윤석열 후보자의 검사 생활은 상당히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진짜 큰 사건들이 지금부터다.
2008년 윤석열은 BBK 특검에 참여했다.
BBK는 투자회사로 활동하다 2년 만에 자취를 감췄지만 BBK 주가조작 사건에 연세 금융사기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시끌벅적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BBK는 큰 성공 없이 끝났다.
그리고 BBK 특검 이후 윤석열은 대전지검 논산지청으로 갔다가 2009년 대구지검 특별수사부장을 거쳐 대검으로 다시 대검으로 복귀한다. 대검찰청으로 돌아온 윤석열은 대검찰청 범죄정보 2 담당관 대검찰청 중수 2 과장 이어서 중수 1 과장까지 거치고 2012년 여름 윤석열은 서울검찰청 제19 부장검사의 자리까지 앉게 된다.
그는 실력으로 막강한 지위에 올랐고 윤석열은 2012년에 결혼(윤석열 부인 김건희)했다.
현재까지 윤석열 자녀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군대도 면제를 받았는데 이유는 난시 때문이라고 한다.
2013년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해였고 국정원의 여론 조작으로 시끄러웠던 해이기도 했다.
이때 윤석열이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으로 가서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장으로 임명됐다.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을 맡은 윤석열의 연기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다채로웠다.
다만 국정원 의견조작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과 윤석열은 경미한 사건으로 수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윤석열이 황교안(당시 법무부 장관)이 부당한 수사지휘를 행사하고 있다고 폭로한다.
사건은 더욱 시끄러워지고 수사팀을 이용해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과 정보원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징역 4년과 정직 4년을 구형한다. 원세훈은 공직선거법 위반 미적용으로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윤석열은 1심 재판이 끝난 뒤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 국정감사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 너무 심해 조영곤 검사 밑에서 수사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당연히 그에게 다시 한번 모든 관심이 쏠렸고, 윤석열의 말을 들은 정갑윤이 '사람에 대한 충성심이 없느냐'고 묻자 윤석열은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라고 명언을 남겼다.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 이후 대구감찰 위원회는 이 2014년 윤석열을 대구 고등검찰청으로 발령한다. 그것은 분명히 좌천이었다. 윤석열처럼 국정원을 털었던 박형철은 좌천된 뒤 옷을 벗고 법률사무소를 열지만 윤석열은 "검찰에서 할 일이 남아 있다"며 힘든 2년의 시간을 버텼다.
2016년 윤석열의 인생을 바꿀 대망의 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터진다.
최순실 게이트 특검을 총괄했던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윤석열을 특검팀의 수사팀장으로 지명하였고 당시 여론은 기존 특검팀이 보여준 긴밀한 관계와 유착을 들어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는 듯했다. 당시 박근혜는 버티고 있는 살아있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특검팀의 합류는 여론을 뒤집는 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다는 의견으로 여론이 점차 바뀌기 시작하며 윤석열의 합류로 이변이 일어났다. 정권이 바뀌게 된 것이다.
화려한 컴백 세리머니를 펼친 윤석열은 곧바로 삼성으로 눈을 돌렸다.
최순실 특검 당시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 당시 삼성 측 변호인이 윤석열과 친분이 있는 문강배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삼성이 방패 삼아서 든 문강배 변호사도 윤석열을 막진 못하였다.
이재용 부회장이 혐의가 인정되자 윤석열은 보강수사를 벌여 결국 이재용 부회장을 구속 시키고 특검이 끝난 후 재판까지 파견 검사로서 참여하면서 말 그대로 끝을 보았다.
박근혜 이재용이 구속되면서 윤석열이 진보 쪽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2007년 5월 대통령이 된 문재인은 윤석열을 서울중앙지검장에 내정했고 윤석열은 좌천된 검사에서 단숨에 검찰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윤석열이 갑자기 서울 중앙지검으로 복귀하자 서울 중앙지검 내부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사실 윤석열의 의미는 기수 문화를 파괴했다는 게 아니라 검찰 개혁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일은 검찰 개혁이었다. 그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윤석열이 진보, 즉 문재인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윤석열이 서울중앙지검장에 들어가 곧바로 검찰 내부의 걸림돌로 꼽히는 우병우 라인 정리에 나선다.
특히 박영선 장관이 지목한 12명과 미스터피자 갑질 논란이 있던 정우현 회장을 이때 우병우 라인은 사실상 싹 정리되었다. 그러면서 막연하게 끝난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을 파헤친다.
민간인 댓글부대와 이명박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국정원 수사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윤석열은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에 파견된 검사들이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사기를 쳤다는 증언과 수사에 대비해 행동 방안을 강구했다는 증언이 나오자 격분하고 관련 검사들을 뿌리치기까지 했다. 장호중 전 부장 직원과 관련 검사들을 모두 좌천시키고 압수수색을 진행했으며 구속영장까지 청구했다.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변창훈 차장검사가 투신하는 사건까지 터졌지만 여론은 윤석열씨 편이었다.
수사가 너무 강압적이라는 평가도 나왔지만 야당의 비판에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국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과 국가안보실장을 지낸 김관진 장관까지 몰아냅니다.
2018년까지 국정원을 잡았냈던 윤석열은 이명박 정부의 최측근이었던 김진모·김백준을 체포해 이명박을 궁지로 몰았다.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을 소환하죠. 윤석열은 이명박의 소환 조사를 진행하고 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합니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승인하며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구속되죠 그 후로도 사법 농단 수사와 이재수 전 기무사사령관 수사 버닝 썬 게이트까지 윤석열을 거칩니다.
당장 8시 뉴스 헤드라인에 떠도 손색이 없을 붉은 사건들을 처리하던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지명되죠 당시 문재인은 임명식에서 검찰 개혁을 강조하며 청와대 행정부 집권 여당을 가리지 말고 살아 있는 권력도 엄정하게 수사할 것을 강조하는데요. 이때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윤석열이 직접 문재인에게 임명장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모두가 윤석열이 문재인의 편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윤석열은 진짜로 세력을 가리지 않고 털어버리기 시작하죠. 윤석열이 검찰총장이 되고 거의 직후에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 특혜와 사모펀드 사학 비리 등의 의혹들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여론에서는 윤석열이 선보인 검찰이 과연 조국을 수사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고 대부분은 수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당시 윤석열은 문재인의 심복 같은 이미지가 강했고 무엇보다 검찰의 직속상관인 법무부 장관을 건드렸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거든요. 하지만 검찰은 여론을 깨부수고 조국에 대한 전방위 압수수색에 나섭니다. 윤석열이 진짜로 살아 있는 그것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권력의 칼을 들이민 것이죠. 심지어 조국 사건은 서울 중앙지검 형사부로 배당된 사건이었는데 서울 중앙지검 부가 두 팔을 들고 강제 수사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수사에 들어간 검찰은 미적거리는 것 없이 신속하게 조국을 털어 나가기 시작했고 이때 윤석열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하나하나가 전부 특종이었죠. 2019년 9월 6일 검찰은 조국의 부인인 정경심 교수를 사문서 위조 혐의로 전격 기소해 버립니다. 정경심 교수의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피의자 소환도 거치지 않고 기소했죠. 며칠 뒤인 9월 9일 조국 일가의 사모펀드 의혹과 관련된 코링크 피와 웰스c엔티 대표들을 상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이건 기각되었는데 프링크 피 이상훈 대표와 웰스 c엔티 대표는 주범이 아닌 종범이라는 점에서 기각이 된 것이었다.
이것으로 조금 제동이 걸리는가 했지만 이어진 9월 14일 검찰은 가족 펀드의 주범으로 지목된 조국의 오촌 조카를 인천공항에서 체포해 버리죠 체포한 이후 16일 검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이번에는 범죄 사실이 상당히 소명된 점과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구속영장을 발부합니다. 조국의 오촌 조카를 어렵게 구속시킨 검찰은 23일 문재인이 해외 순방을 간 틈을 타 조국의 집을 장장 11시간에 걸쳐 압수 수색합니다.
누구 하나 죽어나가더라도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윤석열의 독기가 보이죠. 10월 3일에는 검찰이 정경심을 소환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8시간 만에 조사는 중단됩니다. 정경심 교수는 조서에 서명도 하지 않은 채 귀가했지만 윤석열은 이틀 뒤에 정경심을 출석하게 하죠. 재출석했을 때는 2시간 정도 조사를 받은 후 귀가하는데요. 재밌는 건 이를 두고 여야는 각각 황제 수사가 반대쪽에서는 강압 수사라는 상반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시간은 조금 지나 10월 9일 정경심과 조국 동생의 건강상 문제가 나오며 도주나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구속영장이 기각됩니다. 검찰은 칼을 갈고 21일 다시 보충된 증거들과 내용을 가지고 정경심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죠. 이번에는 구속영장이 발부되면서 결국 정경심은 구속됩니다. 29일에는 조국 동생을 향해 다시 한번 칼을 세우며 구속영장을 신청하는데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성공하며 조국의 가족들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정도로 털어버리죠 조국을 잡아 죽친 이후 윤석열은 문재인 정권 핵심부의 범죄 의혹들 그러니까 유재수의 감찰 무마 의혹이나 울산시장 하명 수사 의혹 등을 소식이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윤석열과 문재인 정부의 갈등도 시작되었죠.
이제 윤석열은 더 이상 진보의 영웅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보수 쪽에서 응원하는 인물이 되었죠. 조국 법무부 장관은 논란 끝에 퇴임했고 추미애가 법무부 장관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정부와 법무부는 노골적으로 윤석열을 몰아붙이기 시작합니다. 윤석열과 추미애 장관 측의 대리 구도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고 2020년 11월 윤석열은 추미애 장관에 의해 징계 및 직무정지 처분을 받게 되죠. 직무정지를 받은 윤석열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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